한국역사연구원 소식지 4호

올해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99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 까닭인지 민간의 학술단체, 독립운동 기념사업회 등이 내년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종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기념행사는 단지 100년 전의 3‧1운동을 회고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데 그치지 않고 100년의 세월 속에 우리가 3‧1운동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를 성찰하고 이후 이 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어떻게 계승‧발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오늘날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3‧1운동이 추구했던 인도, 정의와 민족자결주의가 진정한 평화의 실현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여서 그 의미는 적지 않다.

2018년 3월, 제4회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 학술회의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역사의 현장, 하얼빈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이 회의는 3‧1운동이 추구한 인도와 정의의 실현이라는 보편적 차원을 견지하면서도 한일 관계의 특수한 사정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자리이다. 더욱이 하얼빈에는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반인류적 만행이 저질러진 역사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어두운 과거를 냉철하게 성찰하면서 과거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따라서 나의 이번 하얼빈 방문은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답사하고 싶었던 오랜 염원의 실현이기도 하거니와 동아시아의 어두운 과거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기회로 다가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북만주의 한복판이라 할 하얼빈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궁금함도 떨칠 수가 없음도 부인할 수 없다.

드디어 2018년 3월 22일 복잡미묘한 마음으로 인천공항 구내에 들어섰고 오전 11시 55분(한국 시각)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오후 2시 17분(중국 시각 1시 17분. 이하 중국 시각) 하얼빈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의 규모가 작다는 인상이 먼저 들어왔다. 이전에 갔던 베이징 공항이나 상하이 공항에 비해 그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얼빈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어 그러한 실망감이 적지 않았다. 그 얘기인 즉 1970년대 초반 ‘형제’라는 드라마에서 많은 독립군들이 하얼빈을 중심으로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 일제와 첩보전을 벌이며 조국 독립에 온갖 열성을 바치는 장면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때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던 ‘모시 모시’라는 일본인 형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고 있다. 내가 처음 알게 된 일본어가 아닌가 한다.

안중근 의사 일행이 하얼빈 의거 전에 들렀던 조린공원.
안 의사가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묻어달라고 한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감은 오후 3시 무렵 도리구(道里區) 송화강변의 조린가(兆麟街) 북쪽 끝에 자리한 조린공원(兆麟公園)을 방문하면서 금세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하면서 자신의 유해를 묻어달라고 부탁하였던 장소여서 진지함이 다시금 엄습해 왔던 것이다. 조린공원은 원래 이름이 도리공원(道里公園)으로 1900년에 조성되어 하얼빈 최초의 공원이 되었다. 1946년 당시 사람들은 항일 영웅이었던 이조린(李兆麟)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고 공원 내에서 장례와 안장의식을 치렀으며, 1946년 정식으로 조린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 공원이 중국의 항일 영웅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건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여기에 묻히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서술하겠다. 대신에 안중근 의사의 휘호인 ‘연지(硯池)’와 ‘청초당(靑草塘)’이 새겨진 유묵비(遺墨碑)만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공원을 정비하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고 담 너머 빙등제(氷燈祭) 행사 흔적만 물끄러미 바라보아야 했다. 당시 안의사는 동지인 김성백의 집을 방문한 뒤 이 공원에서 거사를 비장한 각오로 준비를 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우리 일행은 점심을 급히 먹고 러시아 거리를 거쳐 금곡(金谷) 호텔로 들어왔다. 그리고 호텔 안에 있는 세미나실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양국 학자들이 참석한 학술회의가 오후 3시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회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연구서를 출간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어느 해보다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작년 10월 11일 별세한 ‘일본의 양심’ 아라이 신이치 스루가다이(駿河台)대학 명예교수의 부재를 크게 느끼는 자리여서 그 분위기는 엄숙하였다.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데 하셔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에 애석할 뿐이다. 삼가 이 자리를 빌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우선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대한제국기의 ‘국민’ 탄생의 역사와 3‧1독립만세운동’을 발표하였다. 그 동안 발표자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 과정에 초점을 두고 연구해 오면서 ‘민국이념’을 집중 탐색해 온 내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한국인들이 능동적으로 ‘국민’으로 탄생되는 과정과 정점으로서의 3‧1운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이어서 사가가와 노리가츠(笹川紀勝) 메이지대 명예교수가 ‘일본문화인이 3‧1운동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일한(日韓)의 전후 헌법체제와 3‧1운동에 미친 영향의 비교’를 비롯한 3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헌법학자로서 자료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헌법학적인 해석을 통해 이쪽 분야의 문외한인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던졌다. 다음으로 김봉진 기타규슈대학 교수가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을 발표하였다. 그는 국제정치사 전공자이면서도 오랫동안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연구해 왔다. 그런 점에서 이토 피살 과정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증언을 사실에 입각하여 비판한 그의 발표는 하얼빈의 역사성을 환기시키기도 하거니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장렬한 의거를 폄하하려는 일부 일본인의 또 다른 움직임을 엿보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근래 일본의 대표적인 이토 히로부미 연구자인 나카무라 기쿠오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토가 범인이 한국인으로 이미 체포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바보 같은 놈”이라 중얼거렸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이 김봉진교수의 고증에 따르면 모두 허구라는 것이다. 나로서도 충격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여서 그의 서술 내용을 믿었건만 증거가 날조된 셈이다. 끝으로 학술회의 1부의 마지막 발표로 김승일 동아시아미래연구원장이 ‘조소앙의 ‘민국(民國)’ 인식의 연원탐색‘을 발표하였다. 중국사회경제사를 전공하면서도 늘 한일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고 근현대 동아시아사를 아우르는 그의 접근 방식을 이 발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의무교육론에 관심을 두고 있는 나로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에 대한 학계의 연구 동향을 정리하면서 조소앙 사상의 진화 발전 과정을 다루는 이 발표문에 더욱 주목하였다.

학술회의 1부가 끝나자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기 위해 이른바 러시아 거리를 거닐며 예약된 장소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거리의 야경 풍경을 보면서 호텔로 들어와 내일 학술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3월 23일 새벽 6시 나는 호텔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대충 씻은 뒤 호텔을 나섰다. 그러나 시간이 빠듯한지라 자세히 보지 못하고 러시아풍 건물들만 슬쩍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바쁜 발걸음에도 내 눈 앞을 스쳐간 건축 양식과 길거리 경관으로 인해 내가 유럽 어느 도시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학술회의 2부가 8시부터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은 첫날 장거리 이동임에도 피곤한 기색을 내색하지 않은 채 진지하게 회의에 임했다. 우선 내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연구서 출간에 대한 논의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많은 분들이 작년 요코하마 학술회의에서 결의한 대로 단행본의 체제에 합의하면서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약속하였다. 국제학술회의의 결과물은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거나 준비의 미숙으로 난산을 겪는 일이 왕왕 일어나는 작금에 비추어 볼 때 참석자들의 이러한 자세와 의지는 나로서는 반갑기도 하거니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조그마한 도정(道程)으로 다가왔다. 다음 마침내 나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제목은 ‘3‧1운동만세시위에서 한국인 보통학교 학생의 참가양상과 민족의식의 성장’이었다. 보통학생들의 만세 시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는 주제여서 나로서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보통학교 학생들이 1920년대 청년 학생으로 성장하여 민족·사회운동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으며 나아가 해방 후 한국 사회를 이끌었던 장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만세 시위 경험이 그들의 내면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가 궁금했던 것이다. 다행히 몇몇 분의 질문을 받아 혹시나 무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조금은 가셨다. 이어서 세리가와 데쓰요(芹川哲世) 니쇼가쿠샤(二松學舍) 대학 교수가 ‘3‧1독립운동과 일본문학의 관련양상’을 발표하였다. 사실 문학과 역사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교육논문을 발표한 나로서는 하얼빈을 방문하기 전부터 주목한 발표문이 이 글이었다. 당시 일본인이 3‧1독립운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극히 소수의 문학 지식인들이나마 대다수 일본인과 달리 시라든가 소설을 통해서 3‧1운동의 취지에 대해 공감을 표출하지 않았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발표에 따르면 3‧1운동 탄압의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제암리 교회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문학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변영호 쓰루(都留)문과대학 교수가 ‘손병희의 사상과 3‧1독립운동-인내천을 중심으로-’를 발표하였다. 이 발표문은 손병희에 대한 기존의 낮은 평가를 재검토하면서 인내천 사상이 하늘을 비인격적인 신으로 여기는 성리학으로 퇴행했다고 해석하거나 우민관으로 전락했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나아가 인내천에서 강조하는 인격을 오늘날 양심선언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동학 사상의 진화 발전 과정을 좀더 면밀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고 하겠다. 이어 도리우미 유타카(島海豊) 서울대학교 규장각 선임연구원이 ‘3‧1운동과 식민지근대화론’을 발표하였다. 사실 이 주제는 한국 학계와 일본 학계에서 민감한 주제로서 여전히 중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사학계가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의 허와 실을 논급하였다. 발표문에 따르면 식민지근대화론을 ‘식민지 조선경제 발전론’, ‘일제에 의한 경제발전론’, ‘조직적 수탈부재론’, ‘일제권력 경제악용부정론’, ‘경제이익 평등파급론’ 등으로 분류하면서 이에 대해서 시론적인 차원이지만 하나하나 반박하였다. 그의 이런 주장이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반박을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역설했을뿐더러 일제강점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향후 그의 연구가 지니는 무게를 절감하는 동시에 경제사 문제를 정면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에게 경종을 울렸다. 끝으로 이 지면을 빌려 이번 학술회의 과정에서 도리우미 박사와 더불어 유창한 일본어로 통역을 담당한 최성희박사에게 감사를 표한다.

드디어 학술회의가 소기의 목표대로 성과를 거두고 종료하자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으러 러시아 거리를 가로질러 식당으로 갔다. 중간 중간에 오래된 건물이 있었는데 이들 건물 벽에는 이동할 수 없는 역사건축물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고 그 내력이 적혀 있었다. 예컨대 이러한 동판을 통해 유대인이 거주하였던 맨션이 1907년 이 자리에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1935년에 세워진 르네상스 양식의 동아전장(東亞錢庄) 건물도 보였다. 그리고 각종 청동조각상이 길거리 빈 공간에 세워져 있었는데 예전에 러시아인들이 여기에 거주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조각상들이었다. 하얼빈이 19세기 말에 들어와 러시아인에 의해 근대도시로 개발되었지만 이러한 표지 동판으로 역사도시임을 절감케 했다. 특히 대리석을 박아 놓은 고풍스런 길도 이곳의 특징인데, 대리석 보도블록은 금방 조성된 듯 깔끔해 보이지만 사실은 100년을 훌쩍 넘긴 오래된 돌들이다. 건축 당시 1개당 1달러를 투입했을 만큼 단단하게 박힌 블록은 두께가 50~70㎝나 돼 아무리 폭설이 내려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러시아 거리에 설치된 마부 조각상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관동군 731부대가 세균 실험을 위해 살아있는 인간을 가두고 참혹하게 살해한 역사의 현장을 보러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한국인 학자는 물론 일본인 학자도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여서 그 의미는 매우 엄중하게 다가왔다.

주지하다시피 1936년 6월 25일에 창설된 관동군 731부대는 하얼빈에서 중국인, 몽골인, 한국인,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 3천 명 가량을 가두어 넣고 생체실험을 했던 부대로서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사라졌다가 이후 생체실험 현장이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 규모는 무려 24만 8천㎡(약 73,000평)나 되는 어마어마한 넓이다(현재 전시관 면적은 유적지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 물론 미국은 종전 직후 일본군 포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들 부대원의 실체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각종 실험보고서를 확보한 뒤 그들의 대다수를 면책하였으며 보고서도 비공개로 부쳤다. 반면에 생체 실험장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달리 생존자가 전무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폭로될 수 없었다. 더욱이 일제는 패망 직전에 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1892~1959)의 명령에 따라 시설물들을 전면 파괴했기 때문에 그 흔적이 지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국 정부가 1950년 731부대 유적지에 대한 보호에 착수하였고 1983년에 이 유적지를 흑룡강성 성급보호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이어서 2015년 이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발굴하고 복원 작업을 진행하여 2015년 8월 15일 ‘중국 침략 일본군 제731부대 죄증진열관(罪證陳烈館)’을 개관하였다.

731부대 죄증진열관 입구
731부대 본부 건물 앞에 서 있는 필자

전시관 앞에 도착하니 벌써 시침이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정밀하게 관람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렀다. 그런데 전시관 건물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다. 중국인 안내자는 유창한 한국어로 이 전시관의 설계자가 남경대학살전시관를 설계했던 인물임을 알려주었다. 어쩐지 건물 구조라든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건물 현관을 들어서자 ‘반인류폭행’(한글로는 비인도적 잔학행위)이라는 큰 제목이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러시아어, 몽골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 구미인, 러시아인, 몽골인들이 이 전시관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명명한 제목으로 보인다. 도입부에서는 이러한 생체실험의 배경을 일제의 대륙 침략과 연계하여 전시하고 있다. 다음은 731부대의 설치령을 보여준 뒤 생체실험자들을 감금한 각종 시설물과 실험 도구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교토제대 의학부 출신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의 구성원과 부대편제표를 보여주었다. 이는 이러한 실험이 미치광이 몇몇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일본국가의 주도 아래 이시이를 비롯한 일본인 의사 등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벌인 반인륜적 범죄 행위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시이에게 수여된 훈장들은 일본 정부의 범죄 행위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그가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의료 윤리를 팽개치고 사람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의 광기가 우리 일행에게 전해오는 듯하다. 아울러 부대 전체 건물을 모형도로 만들어 건물의 특성과 배치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역시 실험이 세분된 절차에 따라 대단히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그리고 인체 실험 전시장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이 재현되어 있었다. 페스트균 실험을 위해 페스트탄 실험 인체 실험대상자(이른바 마루타)를 십자가에 고정시킨 뒤 비행기가 페스트탄을 투하하는 장면을 구현한 전시물은 온몸을 전율케 하였다. 페스트탄은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으로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넣어 뿌렸다. 그리고 페스트탄에 노출된 인간에게 어떤 증상이 나타나고 어떻게 죽어 가는가를 실험하는 것이다. 물론 생체실험자를 해부한 뒤 기록으로 남긴 각종 보고서와 해부도면도 역시 눈을 감게 하는 기록물이었다. 또한 인체실험대상자가 극한의 추위 속에서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를 보여주는 동상 실험 현장 전시물이나 어머니와 자식을 독가스실에 집어넣고 독가스를 주입하는 실험 광경 역시 눈길을 끌었다. 그 밖에 탄저균 실험, 유행성출혈열 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전시관 현관 제목대로 반인류적 행위라고 규정할 만하였다.

페스트탄의 실험을 위해 십자목에 묶인 생체실험대상자.
일제가 벌인 세균전 지대

또한 일부 전시물은 일제가 각종 세균을 살포하기 위해 폭탄은 물론 애드벌룬을 활용한다든가 강물에 투입하여 주변 지역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은 그들의 대륙침략전쟁이 나치의 잔학행위 수준을 넘은 비인도적 반인류적 패악행위임을 여실하게 증명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무지를 깨닫는 장면에 부딪혀야 했다. 이러한 세균전은 단지 실험에 그치지 않고 중국 화북은 물론 화중, 화남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을 대상으로 실제로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731부대의 범죄 행위를 인지했건만 사실 이러한 극악한 범죄 행위를 몰랐던 셈이다. 특히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세력과 전투하는 지역이라 할 산서, 하남, 하북은 물론 강소, 절강, 복건 지역에 유달리 살포 지역이 많았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제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인륜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따라서 731부대 유적지는 단지 3,000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실험지역에 그치지 않고 군인, 민간인을 가릴 것 없이 최소한 만여 명을 몰살시킨 제노사이드의 극악한 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 행위는 미국의 비호 아래 역사에서 사라졌다.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의 무기 개발에 이들 부대의 실험보고서가 매우 긴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들은 미국으로부터 구명을 받은 뒤 대학을 비롯한 각종 연구소에 취직하여 온갖 직책을 맡았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여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까지 했다. 부대장 이시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미군에게 세균전과 인체 실험 자료를 건네는 조건으로 비밀거래를 함으로써 미국의 보호와 은폐 아래 극동국제군사법정 출석을 면제받았다. 이후 그는 평온한 삶을 살다가 1956년 병사하였다. 이 전시관은 역사의 이러한 아이러니를 보여주려는 듯 이후 이들 부대원의 삶을 추적하였다.

731부대가 폭파한 인체실험대상자 수용시설

마지막으로 옛 본부 시설과 인체 실험대상자의 수용시설 흔적을 둘러보면서 이시이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영구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대대적인 폭파작업을 벌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유구와 폭파 자국들은 긴박했던 폭파의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생체 실험대상자를 운송했던 철로길을 보면서 이곳이 바깥에서 전혀 알 수 없는 범죄 소굴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수많은 굴뚝이 생체실험대상자 소각장 및 독가스실과 연결된 굴뚝이었음은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관람객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냄새를 투입하지 않았지만 그 지독한 시체 썩는 냄새가 여전히 내 콧가를 빙빙 맴도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나는 강의와 교재 집필에 활용할 요량으로 한글판 도록을 구매하였다.

우리 일행은 진열관 방문을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단 이틀 동안 숙박하였지만 내 집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이어서 저녁을 먹으러 몽골인들이 경영하는 샤브샤브집을 찾았다. 벽면에는 몽골인의 풍속과 관련된 그림이 붙어 있어 몽골 음식점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24일 새벽 나는 송화강가에 세워진 탑이 궁금해 일찍 호텔을 나섰다. 러시아풍 건물을 지나 지하도를 건너니 멀게만 보이던 그 탑이 눈앞에 나타났다. 송화강 역시 우리 한강마냥 자주 범람하여 이곳 시민들에게 큰 두통거리였다. 그래서 하얼빈시민들이 대대적인 제방 공사를 하여 오늘날의 제방이 만들어졌다. 탑에는 하얼빈 인민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탑 제목은 ‘하얼빈시인민방홍승리기념탐(哈爾濱市人民防洪勝利紀念塔)’이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각종 직업종사자의 힘찬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이러한 공사가 하얼빈시민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눈길은 어느새 강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강이 3월 중순임에도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이 빙등제가 열리는 도시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송화강을 바라보면서 우리 고대 시대에 고구려와 자웅을 겨루었던 부여가 떠올랐다. 우리 겨레의 발길이 닿았던 이곳에서 태고적 감상에 빠졌던 것이다. 아침식사 시각에 맞추느라 급히 돌아오던 중에 주변을 보니 어느 소학교 교정에 있는 서양어린이 조각을 넣은 분수대가 눈에 띄었다. 얼핏 유럽의 어느 소학교인 듯하였다.

안중근 의사일행이 방문한 김성백 집 터.

이어서 아침밥을 먹고 본격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탐사하는 일정에 들어갔다. 이 탐사에는 안중근 의사 연구의 전문가인 김월배 박사가 동행하였다. 사실 전문가가 동행하지 않으면 이러한 답사는 주마간산격의 답사로 흘러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데 김박사의 해설로 그 의미를 오히려 배가시킬 수 있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삼림가(森林街) 34에 위치한 김성백집 터이다. 김성백은 하얼빈 한민회 회장으로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안중근 의사 일행은 김성백의 집에 여장을 풀고 거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 들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09년 10월 26일 새벽 김성백집을 나섰다. 나로서는 늘 눈으로만 스쳐갔던 안중근 의사의 결의에 찬 숨결이 과장되게 말한다면 스쳐간다고나 할까.

100여 년 전과 사뭇 다른 오늘날 하얼빈역

다음 행선지는 첫날 잠깐 들렀던 조린공원이었다. 첫날에는 비행기에서 내린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비몽사몽간이었다면 이번에는 전문가의 해설 덕분에 좀 더 역사의 현장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10시 무렵에 1909년 설립된 도리조선족중심소학교(하얼빈시 경위4도가(經緯四道街) 7 소재)를 방문하였다. 나 역시 만주 지역을 들르면 재중동포학교를 방문하여 인상적인 체험을 겪었으므로 이번 역시 나에게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토요일이어서 학생들은 등교하지 않았지만 학교 분위기는 학생들의 각종 작품과 교자재를 통해 전해왔다. 예컨대 교표, 교화, 교목을 순한글로 설명하는 글줄에서 ‘배움터’, ‘온 누리’, ‘밝은 마음’을 발견하고 국내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 교육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석보상절의 일부 내용을 정성스럽게 쓴 표구와 훈민정음 해례본 표구를 보면서 이들의 한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고국과 멀리 떨어진 하늘 아래에서 이중 국어를 써야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겨레의 문화적 전통을 지켜가는 모습은 100여 년 전 이 땅을 떠나야 했던 동포의 애환을 넘어 다시금 우뚝 서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 교실은 안중근 의사 전시실로 꾸며져 있어 학생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에게도 상찬을 받는 인물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어서 어느 교실을 들어가니 교실 정면에는 ‘나를 알차게 가꾸고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문구가, 측면에는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돈독히 실행하라’는 문구가 붙어 있어 갑자기 담임선생님이 누구인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밑에는 ‘찬란한 민족문화 자랑스런 민족위인’이라는 코너가 있으며 복도 곳곳에 돌잔치, 단오놀이 풍경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 겨레의 전통을 서울이 아닌 이곳에서 찾다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오전 10시 40분 우리 일행은 오늘 여정의 절정이라 할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역은 새로 단장하고 있는 까닭에 안중근 의사가 벌인 거사의 현장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다만 멀리서 역 주변을 사진으로 찍고 안내판에 붙어있는 옛 하얼빈 역을 바라보며 1909년 10월 26일 당일 현장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떠올렸다. 이곳에 올 때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실망이 적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든 안중근 의사의 의거 지점 표시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까지도 자리하였던 안중근의사 기념관마저 지난 해 3월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이전되어 버렸다. 기념관은 역사의 현장에 자리하여야만 그 역사성과 장소성이 살아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권역 바깥이다 보니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조선민족예술관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11시 40분 경 우리 일행은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추적하듯 하얼빈 역에서 바로 옛 일본영사관 터를 찾았다. 안의사는 동청철도국 공안국 사무실에서 “나는 대한의병 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적장을 총살 응징한 것‘이라고 밝혔음에도 일본영사관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당시 러시아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이런 주장을 왜곡하여 안의사가 “이토공이 자신의 고국에 가한 해악에 대해 원수를 갚고, 또 자신의 친척으로 공작의 명령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 사람의 원한을 풀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고하였다. 안의사의 거사를 철저하게 개인의 복수로 폄하하여 일제에게 넘기고자 한 속셈이 잘 드러난다.

이 곳 벽면에는 문자로 남긴 역사의 왜곡과 달리 다행히 일본영사관 터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고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서 취조를 받았음은 물론 중국의 애국군인과 민간인들, 반파시즘 인물들이 취조 받다가 세균실험대상자로 끌려갔음을 명기하고 있었다. 우연히 밑을 내려다보니 지하실이 보였다. 아마 이곳이 잔혹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취조실이 아닌가 한다. 예전에 들렸던 용정 일본영사관 지하감옥을 연상케 하는 모습니다.

바로 점심을 한식집에서 먹은 뒤 부리나케 조선민족예술관에 소재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꿩 대신 닭이라 할까. 그러나 이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으니 자세히 꼼꼼하게 보기로 마음먹고 해설사를 졸졸 따라다녔다. 안중근 의사의 고향과 가문, 성장과정, 의거 이전의 행적 등을 지도와 각종 사진을 통해 자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특히 하얼빈 역에서 발견하지 못하였던 각종 사진과 잡지, 신문 등을 보여주는 패널은 우리 일행을 그날의 현장으로 실어 나르는 듯하였다. 이 가운데 손문, 양계초를 비롯한 중국 지식인과 정치가들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상찬은 당시 중국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문서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이 1910년 2월 22일에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하얼빈의 한인들이 안의사를 하얼빈에 묻고 기념비를 세워 성대하게 이 애국지사를 기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제가 왜 안중근의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는지 의문이 풀렸다. 물론 일제는 윤봉길 의사와 마찬가지로 보복의 차원에서 유해를 빼돌리려고 하였지만 무엇보다 한국인들이 안중근 의사를 본받아 독립투쟁에 적극 나설 것을 우려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물론 관련 문서가 반드시 발굴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중근기념관’의 안중근 의사 흉상 앞에 선 참가자들

이어서 우리는 정율성기념관에 들렀다. 정율성(1914~1976)은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 인민과 군인들에게는 매우 높이 평가되는 음악가로서 ‘팔로군대합창’을 비롯하여 ‘해방행진곡’, ‘3‧1행진곡’,‘조선인민군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이 가운데 ‘팔로군대합창’에 들어가 있는 ‘팔로군행진곡’은 훗날 ‘중국인민해방군군가’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출생, 성장과 활동을 보여주는 이러한 기념관은 우리 일행에게 뜻깊은 선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오늘날 재중동포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무한한 자부심으로 비쳤다.

3시 10분 무렵에는 이 기념관의 본체라 할 조선족문화예술관 전시실에 들렀다. 특히 우리 생활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온갖 농기구와 각종 풍속을 재현한 미니어처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재중동포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풍속과 관습, 노동과 일상생활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정체성의 근간이 여기서 마련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옛 유대인교회 건물을 발견하고 곳곳에 남아 있는 유대인의 흔적이 이들 종교시설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 이국땅에 살면서 그들은 나라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우리 동포를 어떠한 눈으로 보았을까가 궁금해진다.

저녁 6시 무렵 드디어 러시아 거리의 명물이라 할 러시아식당에 들렀다. 그러고 보니 이곳 하얼빈에 와서 한식, 몽골식, 중국식을 먹었고 이제 러시아 음식을 먹게 되다니 국제 역사 도시 하얼빈에 와 있다는 느낌이 또 한 번 들었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음식을 먹어보았기 때문에 음식보다는 식당 벽에 붙어 있은 고색창연한 사진에 눈길이 갔다. 정말 하얼빈 거주 러시아인의 역사를 보는 듯했다. 마지막 저녁인 까닭에 어제와 달리 한국인 학자와 일본인 학자들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고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 통역담당자분의 고충은 적지 않았으리라. 이분저분의 말씀이 동시에 나오다보니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25일 우리 일행은 일정대로 오늘 하얼빈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러나 너무 아쉬웠다. 긴장감을 가지고 답사 장소를 열심히 탐방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얼빈의 역사를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탑승시각이 오후여서 가고 싶었던 하얼빈 건축예술관(옛 소피아성당)에 들릴 수 있었다.

이 건물의 높이와 전체 면적은 각각 53.35m, 721㎡로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1903년 중동철로(中東鐵路)를 개통하면서 제정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들어오자, 러시아 정부는 1907년 병사들을 위한 군 예배당으로 나무 구조로 된 성당을 건축하였다. 이후 1923년 9월 27일 재건축을 위한 시공식을 열고 장장 9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공사로 화려하면서도 전아한 성소피아 성당이 재탄생하였다. 소피아성당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지만, 러시아식의 건축 형태와 돔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그리하여 아직 문을 열리지 않은 짬을 이용하여 건물 주변을 빙빙 돌아다녔다. 규모도 눈길을 끌거니와 건축 양식 자체가 나에게는 매우 생소했기 때문이다. 내가 과문하지만 하바로프스크에서도 이러한 비잔틴 양식의 건물형태를 보지 않은 듯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일행의 눈길을 끈 것은 여기에 하얼빈의 역사를 사진과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중국 정부가 종교시설을 인정하지 않고 건축예술관으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9시가 되자마자 우리 일행은 예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바깥 모습과 마찬가지로 안의 모습도 장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교회 돔이었으며 그 다음은 각종 역사 사진이었다. 하얼빈 초기의 모습을 비롯하여 중국인민들의 일상생활과 러시아인의 이주 모습 및 송화강 강수욕 모습 그리고 도시화 과정에서 보이는 가로(街路)의 변화와 건물의 특징, 각종 스포츠와 예술 활동을 담은 사진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내가 중국어를 잘한다면 하얼빈 도시사를 공부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관심만큼 자료가 따라오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도록을 구할 수 없었다. 아직 북경이나 심양과 달리 시장경제가 들어오지 않은 듯하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가능한 한 다수 문서와 사진을 통해 하얼빈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함은 분명하다. 여기서 문묘는 물론 유태인 교회도 발견하면서 하얼빈은 중국과 러시아를 혼합한 국제도시를 넘어 전근대와 근대가 혼재하는 역사도시로 자리매김해도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스정교회 성당인 성소피아성당. 현재는 ‘하얼빈건축예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9시 50분 우리 일행은 예정에 없던 장소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가 하얼빈의 도시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서양과 중국이 혼합된 바로크역사문화지대라 할 백년찬음노가(百年餐飮老假)가 새로 단장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도시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횡재라니. 우리 일행 대다수가 나의 심정과 같았으리라 생각한다. 드디어 옛 거리에 들어서니 바로크 풍으로 꾸며진 100년 전의 과거 세계로 돌아간 듯하다. 나는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100년 전 중국인의 일상생활을 내 앨범에 남기고자 하였다. 비단을 파는 상점, 만두를 파는 중국 행상의 모습과 거리에서 악기를 켜는 할아버지와 손녀 악사를 조상(彫像)한 조각상은 안성맞춤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유럽 등지에서 익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에게 다시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아가 우리 인사동 거리나 종로에 포목점 상인을 담은 조각상,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행상을 담은 조각상 등을 세워 서울의 역사가 유구함을 보여주면서 옛 조상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결코 멀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누군가는 이러한 조각상 역시 역사의 박제화라고 비판할지 몰라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역사를 체감할 수 없음도 사실이 아닌가. 궁궐도 제대로 보존하거니와 일상생활의 삶도 여기저기 드러내는 것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리라 본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귀국 길에 올랐다. 언제 하얼빈에 오게 될지 몰라 내 눈과 귀는 지난 3일간의 여정에 머물러 있었다. 다음에 오게 된다면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장소를 제대로 보게 될 수 있을까. 한중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런저런 상념이 내 뇌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다음 일정도 잡아보았다. 내 마음 속 발길은 어느 새 동아시아에서 전쟁의 시대가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펼쳐졌던 여순 감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본인 학자들은 하얼빈의 여러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궁금해진다. 그런 점에서 2019년 3월 단행본의 출간이 참석자들의 지혜를 모으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힘찬 발걸음이 되길 기원해 본다. 끝으로 이러한 모임의 취지와 활동에 공감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역사연구원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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