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원 소식지 2호

Ⅰ. 2017년 상반기 주요 연구 사업 국제학술회의 ‘식민지배체제와 3․1독립만세운동’


– 제3회 요코하마 학술회의

– 학술회의 참가기: 요코하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한일관계를 보다(김태웅)

세미나 ‘항일독립운동과 국제사회’

– ‘항일독립운동과 국제사회’ 2017년 상반기 세미나

– 해외자료소개: 프랑스 외무부문서관 소장 한국독립운동 관련 자료(전정해)

해외자료 조사, 수집 활동


Ⅱ. 2017년 하반기 주요 사업 계획


1. 세미나 ‘항일독립운동과 국제사회’

2. 해외자료 조사, 수집 활동

3. ‘石梧 역사 자료’ 시리즈 간행 사업

 

Ⅲ. 연구원 발자취


1. 학술회의의 취지 및 목표

  이태진 원장은 2001~2008년에 걸쳐 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연구재단,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지원 아래 국제공동연구 “「한국병합」에 대한 역사적, 국제법적 재검토”를 주관하여 공동 연구 저서 󰡔한국병합과 현대󰡕(한국어판, 일본어판)를 2008~2009년에 발간한 바 있다. 본 연구원은 이 성과를 잇고자, 한국병합과 연관선상에 있는 3․1독립만세운동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도 같은 성과를 학계에 제출하고자 국제학술회의 ‘식민지배체제와 3․1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였다. 이를 위해 2014~2018년까지 5회의 학술회의를 가진 다음 원고를 수합하여, 최종적으로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2월까지 공동 연구 저서 󰡔식민지배체제와 3․1독립만세운동󰡕을 간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4년 12월 서울에서 제1회 학술회의를 개최한 다음, 2016년 3월에 제2회 학술회의를 중국 다롄大連에서 가졌으며, 2017년 3월에는 제3회 학술회의를 일본 요코하마横浜에서 개최하였다. 요코하마 회의에서는, 2018년 3월까지 원고를 받아 2018년 3월 개최 예정의 제4회 학술회의(하얼빈)에서 제반 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다음 편집에 들어가 2019년 2월까지 공동연구서를 출간하기로 하였다.

 1) 일시 및 장소

  • 일시: 2017년 3월 24일~26일
  • 장소: 일본 요코하마 사쿠라기쵸 워싱턴 호텔(Sakuragicho Washington Hotel)


 2) 참가자

■ 한국(6명)

  • 이태진李泰鎭: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 강영안姜榮安: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김승일金勝一: 동아시아미래연구원 원장. 중국사회경제사, 통역 겸
  • 김태웅金泰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한국근대사
  • 도리우미 유타카鳥海隆: 서울대학교 박사, 선문대학교 강사, 경제사, 통역 겸
  • 오정섭吳定燮: 한국역사연구원 사무국장, 실무


■ 일본(6명)

  •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이바라키茨城대학 명예교수
  • 사사가와 노리카츠笹川紀勝: 국제기독교대학ICU 명예교수 및 전 메이지明治대학 교수, 헌법/국제법
  • 세리카와 테츠요芹川哲世: 니쇼가쿠샤二松学舍대학 교수, 조선근대문학
  • 가츠무라 마코토勝村誠: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정책과학부 교수
  • 최성희崔誠姫: 히토츠바시一橋대학 특별연구원, 한국근대사, 통역
  • 비온티노 율리안J. Biontino: 지바千葉대학 교수, 한국근대사, 특별참관


 3) 일정

  (1) 제1일(3월 24일)

○ 학술회의 장소 집결( ~13:00)

○ 요코스카․요코하마 답사(13:00~18:00)

  • 요코스카 답사: 요코스카 군항, 일본 최초의 제철소이자 해군조선소였던 옛 요코스카 제철소 관련 유물을 전시한 베르니 기념관, 러일전쟁 당시 일본함대의 기함이던 미카사三笠 기념함 등을 돌아보고 의견 교환.
  • 요코하마 답사: 아시아 최대 규모의 차이나타운이라는 요코하마 중화가 답사

○ 회식(18:00~20:30)


(2) 제2일(3월 25일)

제2일(3월 25일) 회의 모습. 주제별 발표(6명)와 보충연구 발표(4명)가 실시되었다.


○ 오전 회의(09:00~12:00)

 - 사회: 가츠무라 마코토

 <주제별 발표>

  •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3․1독립만세사건과 세계사인식」
  • 사사가와 노리카츠笹川紀勝 「조약무효와 저항권」
  • 이태진李泰鎭 「3․1萬歲運動의 京城 학생시위 상황 분석」
  •  

○ 오후 회의(14:00~18:00)

 - 사회: 김승일

 <주제별 발표>

  • 김태웅金泰雄 「3․1만세운동 시위 官立專門學生들의 내면세계」
  • 강영안姜榮安 「기미독립선언서에 보이는 칸트의 영향」
  • 사사가와 노리카츠笹川紀勝 「일본통치하의 재판판결의 정리-자료중간보고: 다롄大連회의의 보충 형태로」

 <보충연구 발표>

  • 김승일金勝一: 조소앙 사상의 배경에 대한 보충연구 계획 보고.
  • 세리카와 테츠요芹川哲世: 수나가 하지메須永元와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망명자들과의 문학적 교류를 주제로 한 논문 구상 발표.
  • 가츠무라 마코토勝村誠: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중편소설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주제로 한 논문의 보충연구 계획 보고.
  • 도리우미 유타카鳥海隆: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을 주제로 한 논문의 보충연구 계획 보고.

○ 만찬(18:30~20:30)


○ 종합 회의(09:30~12:00) 


(3) 제3일(3월 26일)

○ 종합 회의(09:30~12:00)

제3일(3월 26일) 오전의 종합 회의 모습. 주제별 발표에 대한 보충 토론과 향후 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 향후 일정 논의

  종합회의에서는 이태진 원장의 제안에 따라 이태진, 사사가와 노리가츠를 공동연구서 출간을 위한 편집책임자로 결정하였다.

  제출 기한과 관련해서는, 출판을 위한 번역 기간을 고려하여 2018년 3월까지 개별 논문들을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록 논문은 1인 1편을 기준으로 하되, 주제에 적합한 논문이면 2편까지 수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상의 논문 선정과 편집 방향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2인의 편집책임자들이 2017년 하반기에 편집회의를 위한 회동을 갖기로 하였다.


  • 2018년 학술회의 개최

  향후 일정과 관련하여 2018년 학술회의 개최 여부가 논의에 부쳐졌다. 논의 결과, 제출된 논문들을 검토하고 내용을 조정하기 위한 추가 회의가 필요하다고 참가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2018년 3월에 블라디보스토크나 하얼빈에서 제4회 학술회의를 개최하기로 잠정 결정하였다.


  • 주제별 연구 방향 토의

  종합 회의에서는 23일 실시된 주제별 발표에 대한 보충 질의와 함께 향후 연구 방향에 대한 참가자들의 제언과 토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연구서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총론의 집필 방향, 새롭게 선정된 주제인 독립선언서의 철학적 검토와 관련된 연구 방향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 31독립만세운동을 소재로 한 일본문학작품 번역, 출간 사업

  지난 2차 다롄(중국) 학술회의 당시 세리카와 테츠요 교수는 3 ․ 1독립만세운동을 소재로 한 일본 문학 작품을 선별하여 자료집으로 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현재 3 ․ 1독립만세운동을 소재로 한 한국 문학은 조선총독부의 감시 탓인지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해당 소재의 일본 시, 소설이 지닌 자료적 가치가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2019년 공동연구서 출간 시기에 맞춰 해당 자료집을 한국역사연구원에서 별도로 출판한 계획임을 공지하였다. 출간될 번역서는 시 4편, 소설 5편, 서문, 해설 등 총 320여 쪽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요코하마 답사(13:00~16:00)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으로 개항한 이후 일본과 요코하마의 변화를 보여주는 기록물과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는 요코하마 개항자료관 답사.



요코하마 개항자료관 답사에 나선 참가자들. 뒤에 있는 후박나무는 페리 제독 내항 당시의 기록화에도 그려져 있는 나무이다. 당시의 나무는 1866년의 대화재와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으나 그 때마다 뿌리에서 싹을 틔워 현재의 나무로 자라났다고 한다.

근래 나는 해외 답사나 학술 행사에 별로 참가하지 못했다. 그것은 학교에서 맡고 있는 기록관장 보직으로 신경 쓰는 일이 많아진데다가 외국에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장기 일정에 따른 시간 소요에 대한 조바심으로 해외 출장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요코하마 학술회의 소식은 나의 귀에 솔깃하게 들어왔다. 학술회의 주제가 ‘식민지배체제와 3・1만세운동’으로 일본쪽에서 참가하는 학자들의 면모와 발표 내용이 자연스럽게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들 일본인 학자는 3・1운동을 어떻게 인식할까, 일제 통치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까 이런 등등이 궁금하였다. 또 나 역시 ‘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1895~1946)’ 편찬 작업을 수행하면서 3・1운동 만세시위에 가담한 관립전문학생들의 활동을 집필한 터여서 이를 좀더 학술적인 글로 발전시켜 주변 학자들의 고견을 듣고 싶었다. 더욱이 다가올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나로서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도 엄습했다. 그 날의 만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후속 세대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글을 써야 한다는 소명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2017년 3월 24일 오전 7시 설레는 마음으로 김포공항 대합실로 들어섰다. 여기서 같이 발표할 한국인 학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인천 공항 같았으면 붐비는 여행객으로 피곤했겠지만 이곳은 조금 한산하여 나로서는 상쾌한 마음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얼마 안 되어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모노레일과 지하철을 번갈아 타서 이동한 끝에 요코하마 사쿠라기쵸 워싱턴 호텔의 세미나실에 들어섰다. 시각은 벌써 오후 1시에 이르고 있었다. 백발의 일본인 학자들이 한 분씩 한 분씩 모여들었고 각자 반가운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었다. 제1차 회의 때부터 참가하신 분들은 구면인지라 훨씬 더 정답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나로서는 이번 제3차 회의에 참가하는 처지여서 처음에는 어색함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바쁜 답사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이러한 어색함은 지하철과 전철 내에서 금새 사라져 버렸다.

첫 답사지는 요코스카 군항이었다. 요코스카 중앙역을 빠져나와 베르니 기념관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일본 최초의 제철소이자 해군 조선소였던 옛 요코스카 제철소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우선 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해머는 국지정문화재國指定文化財로서 도쿠가와 막부 말기인 1865년에 건설되어 일본 산업화의 초석을 상징하는 요코스카 제철소의 공업 시설물이었다. 이후 이 제철소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제철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기여한 프랑스인 기사 베르니의 공적을 기념하여 베르니 기념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건립되었고 주변 공원의 이름도 베르니 공원으로 명명되어 있다. 답사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서야 확인해 보니 그 건물은 베르니가 프랑스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프랑스 건축양식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기념관 내부에 들어가 보니 거대한 네덜란드제製 해머가 입구 안쪽에 전시되어 있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러한 기계식 해머들은 불로 달궈진 가단성可鍛性 있는 다량의 철을 내리쳐 다양한 형태의 공업기구를 만드는 데 주된 시설물이었다. 이 해머들을 보면서 메이지 유신기에 들어와서야 산업화가 본격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온 나의 판단이 오류였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제철 생산물이 해군 군함이나 대포가 아닌 산업용으로 활용되었다면 동아시아의 평화가 깨지지 않고 오래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느꼈다.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도 마찬가지였지만 후발 자본주의의 경우, 공업화와 전쟁 무기의 현대화를 한꺼번에 조기에 이루려는 욕망이 여기에도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건물 바깥으로 나와보니 많은 군함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데 현재도 요코스카 항이 미 해군이 사용하고 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곧이어 우리 일행은 저녁 식사가 예약되어 있는지라 급히 여러 택시에 분승하여 미카사 기념함이 정박해 있는 자리로 옮겼다. 이곳에는 베르니 기념관과 달리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마도 미카사 군함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기심 많거니와 러일전쟁 때 미카사 군함을 지휘하며 러시아 발틱 함대를 수장시켰던 도고 헤이하치로에 대한 경외심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요인이 아닐까 한다. 나 역시 한국근대사를 전공하고 학생들에게 종종 러일전쟁을 강의하는 교수로서 미카사 함대에 늘 궁금하던 차여서 호기심이 발동되는 장소였다. 특히 최근에 아베 내각이 국가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시점에 이곳의 모습은 어떠할까 하며 호기심 반 우려감으로 들어섰다.

우선 도고 헤이하치로 동상 앞에 서서 사진 촬영을 하였다. 나에게 동상과 기념관은 우리 학생들에게 후대 정치가들이 과거 인물을 어떻게 재현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대중에게 선전하려 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딱히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2005년인가 도쿄 우에노 공원을 지나치면서 우연히 목도하였던 사이고오 다카모리 동상은 내 뇌리에 오래 남아 있던 터라 동상이나 기념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사이고오 다카모리는 막부 타도 운동에 나선 메이지 유신 삼걸三傑로 꼽히는 정치가이자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다가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여 자살한 비운의 사무라이이다. 그는 현실 정치에서는 패배했지만 도쿄 시민들이 자주 찾는 우에노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짐으로써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대륙을 향한 이른바 ‘진출’을 끊임없이 꿈꾸는 우익 정치가들의 야망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 나의 이런 행위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강의를 염두에 둔 측면도 있지만 내 머리 속에 오랫동안 간직해 온 도고 헤이하치로에 대한 인간적 관심과도 연결되어 있다. 나의 국민학생 시절에 어느 담임선생이 우리들에게 길지 않지만 도고 헤이하치로의 전공과 인격을 감명 깊게 알려주었다. 이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도고 제독이 러시아 발틱 함대를 궤멸시킨 뒤 어느 기자가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도고의 업적을 넬슨과 이순인 제독과 비교하면서 그의 업적을 치켜세우자 그는 이런 아부성 발언에 깜짝 놀라며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비견할지언정 조선의 이순신제독과 비교할지 말라.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승리하였다”고 언명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어린 나이에 이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의 젊은 시절과 발언 의도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지만 문득 문득 그 말씀을 되새겨보면 아마도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극적인 승리가 후세의 적국 장군마저도 감탄시켰음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분이 교육 받았던 젊은 시절과 연결시켜보면 그 분 역시 일제의 군국주의 교육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인간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대한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중대한 사건임을 떠올린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와 개인의 삶을 가끔은 분리시켜 보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갈등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볼 것 같으면 다른 군부 지도자와 달리 우락부락하고 살기에 어린 모습이라기보다는 수양하는 사무라이의 얼굴 같기도 하고 고결한 인품의 성직자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러한 복잡한 심경이 그의 동상으로 이끈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심경은 미카사 기념함 내부의 어린이 전시실을 참관하면서 곧 사그러져 버렸다. 이 전시관은 러일전쟁의 배경, 전개 과정과 결말, 역사적 의미 등을 유물, 사진, 삽화 등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러일전쟁의 이모저모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 중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러일전쟁의 도발 주체와 경위가 분명하지 않았다.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제물포와 뤼순 앞 바다에서 러시아 함대를 먼저 공격하였음이 명기되지 않는 대신에 일본은 러시아의 온갖 위협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평화를 지키려고 했다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특히 전쟁 배경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역사의 왜곡을 넘어 침략주의를 부추기는 내용이 아닌가 한다. 예컨대 전시관 패널 말미 부분에서 공노주의恐露主義를 전반적으로 깔면서 “일본해(우리의 동해를 가리킴)에서 해전의 승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인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 용기를 부여하고 독립을 촉진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 극우 역사교과서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물론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당시 한국의 일부 식자층은 물론 중국인과 베트남인, 인도인 등을 고무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 도발이 대한제국 강점에 이어 만주를 침략하고자 하는 야욕의 산물이라는 점, 그리고 아시아인들도 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 행태를 보면서 ‘환호’에서 ‘경종’으로 돌아섰을 뿐더러 한반도에서는 국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통감 통치에 대항하여 의병운동과 자강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음이 역사의 진실이다. 그러나 기념관 어느 패널에서도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어떻게 침략하고 나아가 아시아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짓밟았는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이곳이 일본의 많은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임을 감안할 때 현재 일본 우익이 무엇을 생각하며 미카사 기념함을 복원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은 과연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미카사 기념함을 야스쿠니 신사 옆을 지키고 있는 일본 극우의 상징 유수칸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여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러일전쟁 때인 1905년 5월의 쓰시마 앞바다 해전 당시 지휘함이던 미카사 기념함 전경. 1926년 ‘미카사 기념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요코스카에 영구 보존했다.

  그리하여 첫날 답사가 이러한 복잡미묘한 심경으로 시작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답사가 아무리 학술적인 성격의 행사라고 하지만 새로운 역사 세계에 대한 조우가 이렇게 무참하게 어긋나는 것에 대한 초조함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러한 조바심도 궁금증을 해소하는 장소를 만나게 되면 어느 사이에 잦아드는 게 인지상정인가보다. 요코스카 항에서 요코하마 시내로 돌아와 중화가中華街를 거닐다보니 이런 심경이 호기심 가득 찬 심경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에게 이곳은 꼭 오고 싶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일제강점하 한반도에 거주하였던 화교를 연구하면서 더 많은 화교가 살았던 일본 화교의 대표격이라고 할 요코하마 화교에 관심을 가졌던 터였다. 그리고 중화가 거리는 이러한 화교의 보금자리인 타운이 만들어진 곳이다. 지금이야 1945년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지만 화교의 흔적이 그래도 여기저기 남아 있고 현재도 화교들이 영업하는 중화요리집이 번성하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요코하마 화교들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일제하 수탈에 못 이겨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 노동자들은 요코하마에서 일본인, 화교들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갔을까. 이런 궁금증이 이 곳 중화가를 거닐면서 떠오르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업적 병통일까. 아니면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내 조상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그 날 첫날밤은 이렇게 설렘, 궁금증, 실망감, 분노감이 서로 뒤엉켜 끝나가고 있었다.

  둘째 날이다. 우리 일행은 어제의 피로를 다 잊었는지 오전 9시에 씩씩한 모습으로 진지하게 세미나실에 들어섰다. 특히 70세를 훌쩍 넘은 원로 학자들은 장시간 도보와 쌀쌀한 날씨에 고생하였음에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영롱한 눈빛으로 학술회의에 임하였다. 빠듯한 일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한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의 일본 방문에 즈음하여 학술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언질을 받았지만 이렇게 일찍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율리안 비온티노 박사가 지바대학에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대학원에서 일제하 남산의 종교 시설을 소재로 삼아 일제의 동화정책의 전개 과정과 그 성격을 해명하는 학위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작년 4월 지바대학에서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근무하고 있는 터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회의는 한일 학자 사이의 국제 학술회의에서 한국, 일본, 독일 학자 사이의 국제학술대회로 격상된 셈이다. 물론 비온티노 박사가 발언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휴식 시간에 일본인 학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면서 그의 궁금증을 토로하거나 한국인 학자와 일본인 학자의 질문에 답하곤 하였다. 특히 구면이었던 최성희 박사와 옛 시절을 떠올리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앞으로 젊은 학자들의 새로운 도약을 기약해 본다.

  첫 발표자는 90세를 넘은 아라이 신이치 선생이었다. 일본 근대사학사의 흐름을 3・1운동 전후 시기와 연결하여 ‘동양사’의 성립 과정, 한국병합과 식민주의 사관, 3・1만세사건과 일본의 동화정책, 조선사의 편찬 등 한일관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들을 심도있게 다루었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의 취지와 방향을 잘 보여주는 자리였다. 이후 사사가와 노리카츠 선생과 이태진 선생이 각각 ‘조약 무효와 저항권’, ‘3・1만세운동의 경성 학생시위 상황분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결코 만만치 않는 주제라 오전 3시간이 금방 지나간 듯하였다. 특히 아라이 신이치 선생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피로의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질의하고 답변하였다. 나로서는 오랫동안 연구에 매진해 온 노학자의 견강성堅剛性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나의 연구 생활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할 자세였다. 그리고 여러 참석자들이 발표자의 글에 대해 진지하고 날카롭게 논평하면서 토론은 열기를 더했다.

오후 발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3‧1 만세 운동 시위 관립전문학생들의 내면 세계’를 위시하여 강영안 선생의 ‘기미독립선언서에 보이는 칸트의 영향’, 사사가와 노리카츠 선생의 ‘일본통치하의 재판판결의 정리’가 발표되었다. 이어서 김승일, 세리카와 테츠요, 가츠무라 마코토, 도리우미 유타카 선생들의 보충 발표가 뒤따랐다.

오전과 오후를 합쳐서 장장 7시간에 걸려 첫날 발표가 끝났다. 다들 피곤했지만 발표자나 논평자나 오늘의 학술회의가 지니는 의미를 되새기며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의 문제를 3‧1운동과 관련하여 한일 관계사 속에서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파장은 오래가리라 본다. 민족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대립을 넘어서서 역사적 실체에 입각하여 상호를 이해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날 미처 다하지 못한 논의는 저녁 식사로 이어져 열띤 논쟁들이 벌어졌다. 한일 간의 언어 장벽이 있었지만 도리우미 유타카 선생과 최성희 박사의 헌신적인 통역으로 좌중의 분위기는 식지 않고 열기를 띠어 가며 상대방의 역사 인식을 좀 더 이해하는 자리로 발전하였다.

  셋째 날이다. 일정대로 이날 오전에는 어제 발표되었던 글들을 중심으로 미처 논의되지 않았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토론이 벌어졌다. 이어서 이번 학술대회의 결과물을 정리하고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문제에 대해 집중 논의가 이루어졌다. 참석자들이 이후 모임의 방향에 대해 강조점을 조금씩 달리했지만 공통적인 구상은 3회에 걸친 학술회의의 성과를 일회적인 논의에 그치지 말고 상호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반듯한 공동연구서로 출간함으로써 이러한 성과를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학자 및 일반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오후 답사에 들어갔다.

  답사는 비가 몹시 내리는 바람에 다소 불편이 따랐다. 그러나 답사에 참가한 일행들은 이런 날씨에 개의치 않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요코하마 개항 자료관에 들어섰다. 나로서는 두 번째 방문이어서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는 선입견이 앞서 있어 그제 답사에 비해서는 그리 흥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시큰둥한 자세는 책 판매대에 놓여 있는 요코하마 화교에 관한 도록을 보면서 다시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늘 궁금했던 화교의 삶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예전에 방문했을 때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관람하고 바깥으로 나섰는데 이번 방문에는 일본인 선생들의 자상한 설명 덕분에 패널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면서 그 의미를 떠올리곤 했다. 이 자리를 빌려 도리우미 유타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생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각국 서양 영사관이 왜 일본의 사찰 경내에 자리했는지 그리고 조계지의 형성 과정을 여러 장의 지도 속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답사는 천천히 꼼꼼하게 할 때 그 의미들이 살아남음을 이번 답사에서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다만 박물관 측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중요한 기록물을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역사학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일행은 오후 4시에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며 각자의 행선지로 출발하였다.

  이번 학술회의와 답사는 이처럼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학자들이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면서 상호의 처지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모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체계적인 공동 연구 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

  어떤 모임도 첫술에 배부를 수가 없다. 인내심을 가지고 상호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거리가 좀더 좁혀지리라 조심스럽게 전망해 본다. 김포 공항의 하늘이 맑게 보인 것은 이번 요코하마 모임을 통해 한일 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미래의 후속 세대에게 희망의 불씨를 전하고자 하는 노력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이러한 모임의 취지와 의미에 공감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역사연구원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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