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원 소식지 3호

목차


I. 2017년 하반기 주요 연구 사업 (1)

세미나 ‘항일독립운동과 국제사회’

-2017년 하반기 활동

-해외자료 소개: 러시아 문서관 소장 한국사 관련 자료 개관 (최덕규)

  1. 모스크바 소재 주요 문서관
  2. 상트-페테프부르크 소재 주요 문서관
  3. 러시아에서 수집 이전된 자료의 현황과 활용전망

I. 2017년 하반기 주요 연구 사업 (2)

해외자료 조사, 수집 활동

-안중근 하얼빈 의거 현장 촬영필름 찾기

-안중근 재판기록 원본 찾기

I. 2017년 하반기 주요 연구 사업 (3)

‘石梧 역사연구자료 시리즈’ 간행 사업


II. 2018년 주요 사업 계획

  1. 국제학술회의 ‘3.1독립만세 운동과 식민지배체제’
  2. 근대사 연구회
  3. 해외 자료 조사, 수집 활동
  4. ‘石梧 역사연구자료’ 시리즈 발간사업


III. 연구원 발자취 (2017년 하반기)

1. 사업의 취지 및 목표

1)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항일독립운동사의 자료 발굴 및 체계화

이 사업은 대한제국이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파리 대표부 및 구미 대표부 설립 등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주권 수호 및 회복 운동과 관련된 해외 자료의 조사 발굴, 수집 및 정리, 체계화를 목표로 한다.

2) 국제평화운동의 관점에서 20세기 전반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카네기 국제평화기금 재단 창설(1900), 노벨평화상 제정 시행 (1901), 국제연맹(1920) ‧ 국제연합(1945)의 창설로 이어지는 20세기 전반 국제평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국제평화운동 진영을 상대로 한 주권회복운동의 실상과 성과, 이에 대한 일제의 방해, 저지 공작을 보여주는 자료의 발굴과 체계화 및 이에 대한 연구를 목표로 한다.

3) 한국 근현대사의 새로운 체계화 필요성

한국 역사학계는 지금까지 제국주의(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에 대한 평가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을 잡아왔으며, 이는 대척적 편향성이 강한 역사인식을 낳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주권회복 운동, 이에 대한 구미 지식인 및 관련 기관들의 반응 등을 추적하여 새로이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이런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한 평가는 냉전시대를 넘어 21세기에 국제화 추세가 현저해진 조건에서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입지를 넓혀가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역사 연구 과제이자 인식이다.

위와 같은 취지와 목표 달성을 위해 연구원에서는 상임연구원 (오정섭) 외에 연구위원을 위촉하였다. 연구위원은 연구사업의 개발 및 정리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해외 수집 자료의 선정, 선정 자료의 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또 연구위원들을 중심으로 이태진 원장의 주관 아래 ‘항일독립운동과 국제사회’ 세미나를 운영하였다.

○ 세미나 참가자

• 이태진(한국역사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이현혜(한국역사연구원 부원장, 한림대 명예교수)

• 도리우미 유타카(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위원 – 일본어 자료 담당)

• 서영희(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연구위원)

• 안창모(경기대학교 건축학과)

• 이경미(한경대학교 의류산업학과)

• 전정해(프랑스 담당 연구위원 – 프랑스어 자료 담당)

• 최덕규(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러시아어 자료 담당)

• 홍문기(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오정섭(한국역사연구원 사무국장)

2. 2017년 하반기 세미나 활동

① 모임 개요

◦ 일시: 2017년 7월 6일

◦ 장소: 연구원 사무실(은석빌딩)

◦ 참석자: 이태진, 도리우미 유타카, 최덕규, 홍문기, 이경미, 오정섭

◦ 발제: 이경미 「대한제국기의 복식제도」

② 발표 요약문

조선이 개항한 19세기 중 후반에는 국가 간에 조약을 맺고 국서를 주고받는 예식을 행하며, 외국정부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하는 등의 서양식 외교의례가 확산되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외국으로 파견하는 외교관들이 서양 현지의 외교의례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 조선 내에 상주하거나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외교관들을 위한 의례를 행하기 위해 세계 통용의 복식체계를 갖추어야 하였다. 특히 서구식 대례복은 금사로 자수한 국가 상징 문양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것으로,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적 외관을 갖추기 위해 시급하게 도입되어야 했다.

개항이후 조선에서는 수신사, 보빙사의 경험과 의견이 반영되어 복식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1884년 ‘갑신 의제개혁’에서는 검은색의 관복, 좁은 소매의 사복으로 전통복식이 간소화 되었고, 1894년 ‘갑오 의제개혁’, 1895년 ‘을미 의제개혁’에서는 전통식 관복을 내용으로 하고 근대적인 대례복 체계를 형식으로 하는 과도기적 복식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 육군과 경찰의 복장은 서구식으로 규정되었고 단발령이 시행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시기에는 동아시아 전통의 천자국 복식제도가 중심이 되었으나 점차 황제의 양복형 대원수 군복과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이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복식제도에서의 ‘구본신참’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대례복에는 무궁화와 오얏꽃(황실 꽃) 문양이 채택되었다. 국권이 침탈된 이후에는 일본의 서구식 대례복 착용이 강요되어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개항 이후 대한제국기에 걸쳐 이루어진 복식제도 개혁은 제도로 규정된 마지막 복식체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의미가 있다. 특히 문관대례복에 도입된 무궁화 문양은 일제 침략기에 민족정신을 결집하는 매개물로, 광복 후에는 국화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지만 아직 직접적 법제화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③ 질의 토론

◦ 서구식 대례복의 도입 시기, 서구식 복식을 도입한 배경과 필요성. 특히 근대적 외교 관계 수립과의 연관성.

◦ 대례복에 왕실 상징의 오얏꽃 문양과 함께 국가 상징으로 무궁화 문양을 채택한 것이 지닌 역사적 의미

◦ 대한제국 서양식 복식에 끼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복식의 영향.

◦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 변화에 따른 서구식 복식의 변천, 전통 대례복(천자국 복식)과 서구식 대례복의 공존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해 논의.

① 모임 개요

◦ 일시: 2017년 9월 15일

◦ 장소: 연구원 사무실(은석빌딩)

◦ 참석자: 이태진, 이현혜, 도리우미 유타카, 전정해, 안창모, 오정섭

◦ 발제: 안창모 「제국으로 가는 길-도시와 건축으로 읽는 대한제국」


② 발표 토론

◦ 경복궁 중건을 주도한 정치세력과 고종의 역할

◦ 개항이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기존 견해의 문제점, 개항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적극적 대응 사례에 대해 토론

◦ 미국, 벨기에에 대한 외교활동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와 고종의 의도.

◦ 근대 건축은 고종의 근대화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견 일치. 특히 영조대 이후 군주가 민과 만나는 장소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탑골공원이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 된 점에 대해서는 향후 공동 연구가 필요하다는 제언에 공감.

① 모임 개요

◦ 일시: 2017년 11월 24일

◦ 장소: 연구원 사무실(은석빌딩)

◦ 참석자: 이태진, 도리우미 유타카, 전정해, 최덕규, 오정섭

◦ 발제 1: 전정해 「상해 프랑스 총영사관 한인 관련 자료(1932-1934)」

◦ 발제 2: 이태진 「대한제국의 산업근대화와 중립국 승인외교」


② 발표 요약문


전정해 상해 프랑스 총영사관 한인 관련 자료(1932-1934)

1. 상해 프랑스 총영사관 문서 개요

상해 프랑스 총영사관 문서는 18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만들어진 각종 문서가 주제별, 시기별 등으로 나뉘어 Série A, B, C로 분류되어 있다. 공관 재개후인 1980년 이후 문서는 Série D로 분류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Série A, Carton 137 ‘상해의 한인들 1922-1934’ 자료 중 1932-1934년 자료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2. ‘상해의 한인들’(19321934) 자료 내용

1) 1932년 자료는 470매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후 일본총영사관이 한인 체포를 목적으로 발부한 체포영장 및 안창호 등을 포함한 11명의 체포 진행, 이에 대해 상해 대한교민단 및 미주 대한인국민회가 프랑스 측에 요청한 한인보호, 중국인 단체인 동방문제연구회의 항의, 프랑스 조계 내에서 행해진 일본인들의 한인 불법체포와 이에 대한 프랑스 측의 항의, 일본이 프랑스 측에 한인 혐의자 정보와 안남인(베트남인) 혐의자들의 정보를 맞교환하자는 제의 등의 문서들이다.

2) 1933-1934년 자료는 400여 매로, 일본 측의 프랑스 조계 불법 침입에 대한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 일본이 제안했던 한인 혐의자 정보와 안남인(베트남인) 혐의자들 정보 교환에 대한 프랑스 측의 거부, 프랑스 조계내 인구 조사시 한인 조사를 위한 일본 경찰의 참여요청에 대한 프랑스 측의 거부, 친일혐의자 옥관빈·석현구 암살 및 유인발 살해미수 사건과 이에 대한 프랑스 측의 태도, 김석의 체포 및 그의 석방을 요구한 중국 언론 기사 발췌, 프랑스의 한인 단체 ‘조선문예인재화성립협회’에 대한 조사와 단체 성격에 관한 의견, 프랑스 경찰이 조사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인사들 정보조사 내용 등이 있다.


3. ‘상해의 한인들’ 1932-1934년 자료에 드러난 특징

1) 발췌문서로 대부분이 한인에 대한 일본의 체포영장 발부 관련 문서들이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대한교민단 주요 인사들의 정보는 당시 거주주소, 직업 및 중국인으로 귀화 여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특이한 점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홍구공원 의거’ 직후가 아닌 1934년 1월 남경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하였다.

3) 일본은 1919년부터 프랑스 측에 상해 프랑스 조계 내 한인 혐의자들과 일본에 있는 인도차이나 혐의자(베트남인)들의 정보 교환 제의를 시작하였다. 특히 1932년 ‘홍구공원 의거’ 후 한인 체포를 강화한 일본이 이를 다시 제안함으로써 이러한 제안을 프랑스 측에 계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 체포된 한인의 중국귀화 증명서 제시로 발생한 ‘이중국적’ 문제였다. 한인들은 일본 측의 체포 공작을 피하려 중국 귀화증을 발급받았고, 중국 국적법은 1914년 제정 후 1929년 2월 개정되었는데, 개정된 중국 국적법은 이중국적을 인정하고 있었다. 체포된 한인이 중국귀화 증명서를 제시하면 중국 정부는 그의 석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일본은 한인의 귀화 자체를 부정하였다. 프랑스 측은 1933년 말경부터 1929년 이후 귀화증명서만 인정하여 석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③ 질의 토론

전정해 발표

◦ 상해 프랑스 총영사관 한인 관계 자료 현황, 각 자료군(資料群)의 특징에 대한 소개.

◦ 기간행 자료집 목록 검토. 기 간행 자료집의 문제점과 향후 자료수집 계획에 대해 논의

◦ 프랑스 자료 이외에 러시아, 일본 자료 추가 확인과 확보 계획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

이태진 발표

◦ 대한제국의 외국 차관 교섭과 중립국 승인외교, 광무황제 즉위 40주년 칭경 예식이 지닌 정치적·역사적 의미에 대한 평가.

◦ 전신(電信) 시설의 등장이 근대 사회 형성에 미친 영향, 일본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한반도에 시설된 전신망의 장악을 위한 전략 등에 대해 토론.

◦ 서구 주요 국가 및 국제기구에 대한 외교적 활동에 주력했던 주불공사관 조직과 주불공사관이 생산한 문건의 행방에 관한 조사 필요성과 방안 논의.

◦ 20세기 초, 일본이 ‘대아시아주의’에서 ‘동양평화’로 태세를 전환한 배경, 특히 당시 국제사회에 불던 국제 평화운동 바람과의 관계에 대해 토론.

◦ 일본이 제시한 ‘동양평화론’에 감춰진 침략적 의도, 즉 ‘일본 천황이 지배하는 새로운 동아시아’로서의 ‘동양’이란 용어의 등장이 가지는 의미 주목 필요성.


고종이 개명 군주로서 조약 관계에 의한 새로운 국제질서에 진입하면서 서양의 기계문명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꾀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각도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발표는 고종이 1896년 2월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다시피 한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주(移駐)한 다음 친일내각을 붕괴시키고 왕권을 회복한 다음, 서구 열강을 상대로 산업근대화를 위한 차관 교섭과 중립국 승인외교를 동시에 추진한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러시아에서는 1896년 6월에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아직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은 민영환(閔泳煥)을 특명전권공사로 삼아 이를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민영환에게는 대관식 참석 외에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차관 교섭의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사업으로 재정이 어려워 대신 프랑스 정부를 소개해 주었다. 고종은 이듬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전환국장 겸 내장원경인 이용익(李容翊)을 주무자로 삼아 프랑스, 벨기에의 자본가들을 상대로 비밀히 차관 교섭을 추진하게 하였다. 1900년부터는 중립국인 벨기에와의 교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중립국을 승인받는 전략을 동시에 펼쳤다. 북한지역의 광산개발, 철도 개설 및 중앙은행 설립 등을 투자 유치 대상으로 내세웠다.

프랑스, 벨기에의 기업가와 기업 거래 은행들이 상당한 관심을 표하여 운난(雲南) 신디케이트를 대신하여 신설한 코리아 신디케이트 대표를 비롯한 관계자가 네 차례(4명)나 서울에 올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는 서구 열강이 한반도에 자본을 투자하게 하여 그 자산의 안정성 확보의 차원에서 중립국을 승인하도록 하는 전략을 세워 추진하였다. 중립국 승인 문제는 러시아 정부가 실제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지하게 설득하는 모습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이런 노력은 일찍부터 한반도 차지를 계획하고 있던 일본 메이지 정부의 방해를 받았다. 황제는 모든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하였지만,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 공사관이 이를 포착하여 러시아를 경계하는 영국 정부를 움직여 1902년 1월 30일 ‘영일협약’(제1차 영일동맹)을 성립시켜 프랑스, 벨기에 자본가들의 한국 투자를 가로막았다. 이 협약이 영, 일 양국이 서로 인도와 한국에서의 “정치적, 상업적, 공업적 이익”을 보장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어느 모로 보나 대한제국의 차관 교섭과 중립국 승인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당시 국제 금융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한국정부와 교섭을 펼치던 프랑스, 벨기에 자본가들을 이후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하였다.

대한제국 황제(고종)는 같은 해 10월 18일 특별한 국제이벤트를 열기로 하였다. 황태자가 올리는 황제의 즉위 40주년 칭경 예식에 수교국 11개국(일본, 미국, 독일, 영국, 이태리,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청국, 벨기에, 덴마크)의 특사를 초대하기로 하였다. 각국 특사들이 그간 현대화한 서울의 모습을 직접 보게 하면서 투자 교섭과 중립국 승인외교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려고 했다. 이 특별한 기획은 불행하게도 이 해 8~9월에 콜레라가 돌기 시작하여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듬해 1903년 4월로 한차례 연기했지만 이때가 되어서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아 국내 행사로 바꾸어 행해지고 말았다. 이해 8월에 대한제국 황제는 외교전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일본이 곧 일으킬 전쟁에 대비하여 전시 중립국을 인정받는 외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실제로 근 8년 간 진행해온 군비 확장을 마무리 짓는 상황에서 러시아와의 개전이 임박한 조짐을 많이 보여, 대한제국 황제는 러시아 황제를 상대로 전시 중립국 승인외교를 비밀리에 벌였다.

이 발표문은 2017년 10월 12일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개최한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 심포지엄 “대한제국, 부국강병 근대 자주 국가를 꿈꾸다”에 제출되었던 것으로 한국역사연구원의 세미나 ‘국제사회와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원고 완성도를 높였다. 이 논문은 대한제국의 근대국가 수립 정책이 체계적 방략을 가지고 추진된 측면을 입증한 최초의 연구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평가되었다.

1902년 10월로 예정된 즉위40주년 칭경예식을 수교국 대표들을 초청하여 국제행사로 열기로 하여 회의장으로 지은 돈덕전
황실 땅을 내서 숙소로 지은 호텔(세칭 손탁호텔)

3. ‘(가칭) 근대사 연구회로 확대 개편

1) 확대 개편의 필요성

연구원은 2016년부터 세미나 ‘항일독립운동과 국제사회’를 구성하여 프랑스․러시아․미국 등지의 한국사 관련 사료 현황에 대한 정보 교환을 도모하였다. 1년 8개월 동안 13차의 세미나를 통하여 사료 분포에 대한 윤곽을 서로 공유하는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내외 자료 이해의 수준을 넘어 새로운 근·현대사 체계화를 위해서는 연구자들 간의 연구 성과의 교류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참여 연구자를 확대하여 기존 세미나를 ‘(가칭) 근대사 연구회’로 확대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2) ‘근대사 연구회발족 과정

세미나를 ‘연구회’로 확대 개편하게 된 계기는 2017년 10월 12일, 국립고궁박물관이 주체한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발표자, 토론자들이 본 연구원의 사업 구상에 동조하여, 기존 세미나 팀과 함께 2017년 12월 13일 오후 2시에 위 국제학술회의의 종합토론 모임에 참석한 뒤, 경복궁역 인근의 ‘에코 밥상’에서 발기회를 발기회에서는 2018년 1월부터 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후 6시 연구회 모임을 가지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근대사 연구회 참가자 명단은 ‘2018년 사업계획’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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