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음악이 만나는 대축제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무력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차례로 빼앗으면서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국은 자력으로 근대화 할 능력이 없는 나라라고 선전하였다. 이런 악선전 속에 한국 근대를 이끈 군주 고종은 ‘바보군주’가 되었다. 잘못된 역사인식이 광복 후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도 바로 고쳐지지 않는 현실이다.
고종은 20대 청년 시절부터 자주 독립과 자력 근대화의 길을 찾던 군주였다. 그는 한 서양인 기독교 주교의 알현을 받는 자리에서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신문명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니 더 많은 선생님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에 미션 스쿨이 많아졌는데도 이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바보 군주’란 거짓 정보가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였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왕비가 궁 안에서 살해당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왕은 짐이 왕비의 몸을 궁 안에서 지키지 못하였으니 짐이 왕비를 저버렸다고 통탄하였다. 왕 자신의 신변조차 위협을 받아 새벽에 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였다. 거기서 1년 간 머물면서 일본 앞잡이정권을 와해시키고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거듭나게 하는 준비를 시작하였다.
수도 서울을 현대도시로 만들기 위해 도로의 폭을 넓히고 전기 시설을 확대하여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미국의 대통령궁(현 백악관)처럼 도심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새로 지어 이곳을 방사상 도로의 결절 점으로 삼아 황성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초대 주미공사관 팀이 나선 도시개조사업은 종로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탑골에 공원을 조성하였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된 뒤 1901년에는 서울을 지키는 시위연대에 군악대를 창설하고 애국가도 새로 지었다. 군악대의 나팔소리가 새 궁전과 탑골공원에서 울려 퍼졌다. 애국가 연주는 국민의식을 드높이고, 서양 각국의 국가와 민요, 명곡들은 시민의 눈과 귀를 저 먼 서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대한제국 양악대 창설 117주년을 기념하는 ‘탑골공원 대 음악축제’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근대’를 되찾는 아름답고, 거룩한 행보이다.
우리의 자력 근대화의 능력을 담보하는 증거들은 그간 일제에 의해 유실 당하였다. 독일에서 구입한 최신의 구리 음향판 연주 무대 호라이전트(horizont)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공원 자체가 아예 대한제국의 영국인 재정고문이 만들어 준 것이란 허위정보가 안내판을 장식하였다. 이 모든 잘못이 바로 잡아지는 기회로서 대축제의 의미가 더하기를 바란다.
지난해 늦가을 ‘뉴 코리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송재용 단장이 찾아와 축제 행사를 제안하고, 올 봄에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역사, 음악 전공 여러분이 기꺼이 응하여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역사와 음악이 함께 하는 초유의 문화행사를 시민과 함께 하여 더욱 뜻 깊다. 축제의 성공을 기원해 마지않는다.
자문위원회 위원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1부: 서울도시 개조사업 “전차가 달리는 거리”
서울에 전차가 달린 역사 연표
1896년
2월 군주 고종, 일본군이 장악한 경복궁(건청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주(移駐)함. 김홍집 친일내각 붕괴, 왕권 회복
9월 서울도시개조사업 시작, 경운궁(현 덕수궁) 착공
1897년
2월 경운궁(현 덕수궁) 함령전이 준공되어 군주 이곳으로 환궁
10월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 거행, 대한제국 선포
1898년
1월 한성전기회사 설립: 고종 황제 20만원 출자, 미국 콜브란 보스트윅사 기술 제공
1899년
3월 탑골 원각사 자리에 탑골공원 건립 공사 시작.
5월 동대문~서대문 구간 전차 개통, 이어서 종각~남대문~서대문 철도정거장 구간 개통
1900년
4월 서울 종로에 가로등 시설
1901년
8월 서울 전기 백열등 점등식
1903년
8월 일본 동경 전차 개통
1904년
2월 6일 러일전쟁, 서울도시개조사업 중단
2부: 탑골공원 탄생과 대한제국 양악대
탑골공원 탄생
이곳서 울려 퍼진 양악 역사
1899년
3월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의 건의로 철물교 옆 탑골 원각사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기로 함.
4월 탑골 원각사 구역 내 거주민들의 이주를 위해 탁지부에서 5만원을 부담하기로 하고 6월부터 철거 시작.
1900년
12월 19일 칙령 제59호로 한성을 지키는 시위제일연대(侍衛第一聯隊)에 군악대 설치를 명함
1901년
2월 일본정부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귀국할 예정인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빙, 이때 입국하였다.
3월 백우용이 에케르트 통역관으로 군악대 입단, 4월부터 군악대 교육 시작
9월 7일 시위군악대(양악대), 경운궁에서 황제(고종) 탄신 50주년 만수성절에서 첫 연주
1902년
3월 1일 초대 군악대장 김학수(金學秀) 임명
8월 15일 프란츠 에케르트 단장이 지은 <대한제국애국가> 공포
1905년
1월 27일 김학수, 일등 군악장(軍樂長)으로 임명. 탑골공원의 건물들이 모습을 갖추어 문을 염
1906년
12월 14일 백우용(白禹鏞)을 이등 군악장으로 임명
1907년
3월 군악대장 백우용 임명
7월 27일 헤이그 특사 파견이 알려지자 일본 통감부가 황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거짓 조칙으로 군대까지 해산시켜 군악대 폐지됨
* 군악대는 1910년 8월 강제 병합 후 백우용의 지휘아래 ‘이왕직양악대’로 다시 모여 1918년까지 존속하다가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으로 해산 당한 뒤 이해 10월에 사설 ‘경성악대’로 재조직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시위 군악대(대한제국 양악대)의 연주 활동
경운궁(현 덕수궁) 내 돈덕전 등 궁전, 창덕궁, 탑골공원, 장충단, 각국 공사관, 명동성당, 손탁호텔, 훈련원 등에서 연주하였다. 1907년 폐지 이후 이왕직 양악대가 된 후는 탑골공원과 그 옆에 있던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가장 많은 연주 행사를 가졌다.
양악대의 연주 레퍼토리: 지휘자 프란츠 에케르트의 대한제국 애국가를 비롯하여 브람스의 헝가리안 댄스,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등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명곡들을 연주하였다.
대한제국 양악대에 대한 서양인들의 평가
“한국인은 농업 다음으로 군악을 잘 한다는 말이 있다. 군악대가 설립된 지 몇 해 밖에 되지 않아 학습한 곡목도 아직 많지 않은데도 연주법은 영국의 빅토리아 관악대나 미국 수사(해군) 관악대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한국을 사랑하여 고종황제를 위해 일생을 바친 대한제국 고문 호머 헐버트)
“(궁에 초대되어) 식사를 기다리는데 황제의 악대가 연주하여 여흥을 돋우었다. 유럽풍의 옷을 완벽하게 갖추어 입은 30여 명의 악사들로 이루어진 악단은 훌륭한 독일인 지휘자 프란츠 에케르트의 지휘로 연주하였다.
(중략) 그는 한국의 국가를 작곡하였으며 2년간 부지런하고 끈기 있는 작업을 통해 이 악단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이태리)의 지방에서 연주하는 많은 악단들 못지않았다. 약 한 시간 정도 계속되는 음악 감상에는 대신들과 외교관들, 통역관이 함께 자리를 하였다.”
(1900~1902년 서울에서 근무한 이태리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의 <한국과 한국인>에서)
자문위원회 명단
- 이태진 (자문위원장)
-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안창모 (경기대학교 교수)
- 김선아 (창덕궁앞 열하나 동네 대표)
- 유진영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 조윤영 (충남도립교향악단 연주자, 음악사 전공)
- 한스 크나이더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최창언 ((주)한림 이앤씨 건축사무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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