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홈페이지를 열며

 

 

초등학교 졸업할 때부터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시작’을 말씀하셨다. 2009년 2월 말, 근 40년을 오가던 관악 캠퍼스(서울대학교) 출근이 멈추어졌다. 선배 교수들로부터, 퇴임하면 오갈 데 없게 되어 누가 불러주지 않나 하는 바람으로 소일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나는 퇴임 3년 전부터 운세가 묘하게 돌아가 ‘다행히’ 그런 생각이 들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었다.

2006년 봄, 역사계열 후배 교수 너 댓이 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곧 있을 학장선거에 출마하란다. 단번에 당선시켜 주겠으니 거절하지 말란다. 몇 차례 사양했지만 못 이겼다. 교황 선출 식 투표로 세 차례 만에 겨우 당선되었다. 2008년 7월말까지 2년 간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장 노릇하면서 ‘최고지도자(CEO) 인문학 과정’을 만들었다. 자고나면 신문지면에 오르는 ‘인문학 위기’란 말이 싫어 인문학자들도 할 말이 많다는 뜻으로 이 과정을 만들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미 지도자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타 대학 학장들을 찾아 자문을 구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얼굴인 이름 짓기가 어려웠다. 고심 끝에 르네상스기의 인문학 바람을 일으킨 에라스뮈스의 ‘Ad fontes(원천으로)’를 차용하여 Ad fontes program (AFP)이라고 이름 하였다. 이 분야에 정통한 어느 교수의 재치 있는 제안이 받아들여 이루어진 작명이었다. 첫 모집 공고를 내면서 정원을 제대로 채울까 마음 졸였지만 이 과정이 전국에 인문학 돌풍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박을 쳤다. 퇴임 후에도 그 여력으로 과정 수료 인사의 제안을 받아 격주로 모이는 역사공부 모임을 만들어 7년 간 147회까지 이끌었다. 이와는 별개로 한국 근대, 곧 고종시대의 역사 강의 부탁도 줄을 잇다시피 하여 교수직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사 전공 반세기에 연구실 벽을 가리기 시작한 책이 어느새 만권을 훌쩍 넘어 연구실이 없어지면 이걸 어디에 두느냐가 큰 걱정거리였다. 퇴임 직후 역사공부 모임을 시작할 무렵 그 분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역사연구원’을 만들어 작지 않은 공간을 확보했다. 그 후에는 AFP 2기 출신인 한국 콜마 윤동한(尹東漢) 회장의 배려로 ‘石梧 문화재단’ 부설이 되어 공간 문제를 넘어 연구원으로서의 여러 요건 갖추기가 이루어졌다. 연구원으로서의 기초 요건을 갖추어 필요한 학술행사를 수년 째 진행하고 있다. 이를 「소식지」로 담다가 새로운 도약을 기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열기로 하였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자주 찾는 공간이 되어 그 성원으로 도약의 힘을 높이 쌓아 올리고자 한다.

 

2019년 1월

한국역사연구원 원장

이태진